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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본 기사 출처
https://news.sbs.co.kr/news/endPage.do?news_id=N1004923378&plink=ORI&cooper=NAVER
2018.09.07
안중근 의사의 사형이 집행되던 1910년 3월 26일 형장 통역관으로 참여했던 소노키가 남긴 '사형시말보고서'는 당시 상황을 비교적 상세하게 적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형 집행 후 뤼순감옥 교회실에서 예배를 마친 뒤 시신을 매장하기까지 과정을 생략했기 때문에(의도적인 누락으로 생각합니다) 안 의사 유해 매장지를 특정하는 데는 한계를 드러냈습니다.
오전 10시 20분 교회실 특별 예배부터 매장을 마무리했다는 오후 1시까지 두 시간여의 공백은 그날의 유해 매장 상황을 이해하기 위한 필수적인 핵심 퍼즐이었습니다.
안 의사가 순국할 당시 형무소장의 딸인 이마이 후사코가 이 기록의 공백을 채워주는 듯했습니다. 당시 8살이었던 후사코는 안 의사 사형 집행날 상황을 증언합니다. 사람들이 관을 메고 감옥 뒷문으로 나와 뒷산 묘지로 갔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2장의 사진을 제공합니다. 1911년 뤼순감옥 뒤편 묘지에서 사형수 천도제를 지낸 뒤 찍은 사진인데, 안 의사의 매장 지점을 빨간 화살표로 표시해놨습니다.
후사코가 제공한 사진과 증언이 우리 정부의 2008년 유해발굴 조사의 결정적인 계기였습니다. 사진의 지형과 당시 지도 등을 비교해 매장 추정지를 특정했습니다. 그 지역은 뤼순감옥에서 북쪽으로 직선거리로 100m에 불과한 곳이었습니다.
유해 발굴단은 2008년 3월과 4월, 두 차례에 걸쳐 뤼순감옥 북문 뒤쪽 일대에 대한 발굴 조사를 벌였습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유해는 단 한 구도 발굴되지 않았고, 깨진 그릇 조각들만 발견됐습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었겠지만, 애초부터 희미한 어릴 적 기억과 사진 만으론 매장지를 특정한다는 게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애써 발굴한 그 지역이 일본인 공동묘지라는 설도 있고, 1940년대에 뤼순감옥 묘지로 이용됐던 곳이라는 얘기도 나왔습니다. 안중근 의사가 순국한 1910년과는 시기적으로 맞지 않는다는 얘깁니다.
당시 뤼순감옥 서쪽엔 일본인 간수들 숙소가 있었습니다. 유해 발굴팀이 조사한 북문 뒤쪽 일대와 근접한 지역입니다. 이를 두고도 일제 입장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주살한 안 의사를 일본인 간수들 숙소 바로 옆에 묻었을까라는 상식적인 의문도 듭니다.
또 유해발굴 지역이 뤼순감옥과 너무 가깝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뤼순감옥에서 지금은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들어선 이 지역까지 걸어보니 불과 몇 분 정도면 도착하는 거리였습니다. 소노키 보고서에 적힌 교회실 특별예배부터 매장까지 걸린 두 시간여를 채우기엔 너무나 짧은 거리였습니다. 뤼순감옥 공동묘지라고 불렸던 지역은 따로 있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이 '둥산포' 즉 동쪽 산언덕이라고 불렀던 곳입니다. 뤼순감옥에서 동쪽으로 약 1.2km 거리에 위치해 있습니다. 이 지역은 1907년부터 1942년까지 뤼순감옥 공동묘지로 사용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안 의사가 순국할 당시에도 뤼순감옥 공동묘지로 사용됐던 셈입니다. 다롄시도 2001년 이 곳에 뤼순감옥구지묘지, 즉 뤼순감옥 옛 묘지터라는 비석을 설치했습니다. 2003년 뤼순일러감옥 실록엔 시체를 이곳에 묻거나 일본여순의학학교 시체저장실로 옮겨져 해부시험용으로 제공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즉 둥산포 지역이 뤼순감옥 재소자들의 공동묘지로 이용됐다는 사실이 증언이나 기록으로 남아 있다는 얘깁니다. 지난주 둥산포 묘지 현장을 방문했을 땐 늦여름이라 나무가 우거져 묘지 일대 전체를 한 번에 조감할 순 없었습니다. 그래도 수풀을 헤치고 들어가다 보면 뤼순감옥 옛 묘지터 비석은 여전히 그대로였고, 산 안쪽으로 더 들어가면 일반인들의 개인 묘지가 수두룩했습니다. 유해조사팀이 2008년 발굴 당시에도 많은 사람들이 왜 엉뚱한 곳을 파고 있냐고 의아해했다는 증언도 있었다고 합니다. 발굴 당시 둥산포 묘지도 함께 조사했더라면 이런 아쉬움이 남지 않았을텐데라는 탄식이 저절로 들었습니다.
이쯤 되면 둥산포 묘지가 안 의사 매장지로 유력해 보입니다. 하지만 안 의사 유해찾기 전문가들은 '이곳이 매장지다' 혹은 '이곳이 확실하다'라는 표현을 매우 조심스러워합니다. 이 곳 역시 정황 증거일 뿐 객관적인 사료적 증거가 부족하다는 이유입니다.
안중근 의사 유해발굴 기회가 많지 않을 것인 만큼, 매장지 사료 증거를 더 찾아서, 더 확실한 발굴을 진행해야 한다는 조심성의 표현으로 느껴졌습니다. 여기에 안 의사 유해를 의도적으로 숨기려고 했던 일제가 그냥 순순히 공동묘지에 매장했을까 하는 개인적인 의심도 들더군요. 이런 여러 이유 때문인지 전문가들은 둥산포 묘지를 유력한 매장 후보지 정도로만 표현하고 있습니다. 정부도 이젠 둥산포 묘지를 주목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설사 안 의사 유해가 묻힌 객관적 사료 증거가 추가로 발견되지 않더라도, 더 이상 둥산포 묘지를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노릇입니다. 만약 안 의사 유해가 둥산포 묘지에 묻혀 있지 않다면, 상황은 훨씬 더 복잡해지고 유해 발굴은 더 암울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둥산포 묘지 지역은 문물 보호지역입니다. 중국 정부의 협조 없이는 발굴 조사를 진행하기 어렵다는 얘깁니다. 중국 정부는 2008년 발굴 실패 이후 확실한 문건 없이는 더 협조하기 어렵다는 입장으로 돌아섰습니다. 그나마 지금은 남북한이 합의에 의한 정확한 유해 매장지점을 특정하면 협조하겠다는 정도의 입장으로 좀 누그러졌습니다.
안 의사 유해발굴을 위해 중국 측의 협조를 이끌어내려면 북한과의 합의가 필요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입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광복절날 안중근 의사 유해발굴을 남북한 공동으로 추진하겠다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나온 발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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